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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3

글을 읽고_바늘과 가죽의 시(詩) (구병모) 백 아니면 흑. 나 아니면 너. 우리 아니면 그들. '아니면'의 자리에 '과'나 '와'가 들어가는 일은 흔치 않다. 간혹 짝지어서 불리는 예외도 있는데 죽음과 삶을 가리킬 때. 죽음과 같은 삶. 삶이자 죽음. 생명이 거한 곳에 어김없이 절반의 지분을 차지한, 삶과 죽음.-12살아남는다 치면 그 영속성이, 그러나 영원한지는 알 수 없는 고작 그뿐인 지속성이 주는 의미란 무엇이겠는지를, 묻지 않는다.-39사람들이 통틀어 옛날이야기라고 부르는 전설이나 신화, 민담에는 그런 이들 천지다. 저주와 천대와 박해를 받지만 사실은 유능하거나 은밀한 축복을 받은 이들이, 잘난 척하다 곤경에 빠진 친인척을 구해내고 기운 집안의 부를 일구거나 마을을 구한다. 미아는 형제들과 세상을 거닐 적에 그런 인간들을 비롯하여 그런 인.. 2024. 9. 22.
글을 읽고_복자에게(김금희) 까치는 무슨 일인지 살얼음이 언 연못에 떨어져 날개를 퍼덕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날개를 퍼덕거릴 때마다 오히려 다리가 미끄러져서 날개가 물기에 젖었다. 일어서기 위해서는 날개를 움직여야 하는데 날개를 움직이면 몸이 차가워져 동사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홍유가 잠깐만요, 하더니 도서관 밖으로 나가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까치를 집어냈다. 그리고 자기 차에서 수건을 꺼내 닦았다. 한 시간쯤 지나 새는 기력을 되찾았다. 홍유는 그때 내가 "뭘 그렇게까지 해요?" 하고 물었다고 기억했다. "안 그러면 죽지 않겠어요?" 홍유가 말하자 내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꼭 넣은 채 "어차피 그런 것도 다 자연인데요" 했다고. 홍유는 바로 그 말을 듣고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2024. 9. 19.
글을 읽고_연년세세(황정은) 한세진은 가끔 이순일의 피로에 책임을 느꼈지만, 그 집 구석구석에 쌓이고 있는 엄마의 피로와 엄마의 후줄근한 크록스 샌들 같은 것이 자기의 무능 탓인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이야기들을 그냥 들었다. 그래 엄마, 그래요, 하면서.-22 해마다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을 낫으로 끊어내며 가야 하는 마른 도랑과 뱀이 늘어져 있곤 하는 덤불,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휘어진 나무와 이끼들, 볼품없이 이지러진 봉분과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들, 묘를 둘러싼 밤나무, 소나무의 침묵을 그들은 몰랐다. 이순일이 매년 낫으로 길을 내며 거기로 올라가는 이유를 한세진은 이해했다. 엄마에게는 거기가 친정일 것이다. 그 묘가.-17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그런 거 아냐.너무 효도하려고 무리.. 2024.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