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진은 가끔 이순일의 피로에 책임을 느꼈지만, 그 집 구석구석에 쌓이고 있는 엄마의 피로와 엄마의 후줄근한 크록스 샌들 같은 것이 자기의 무능 탓인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이야기들을 그냥 들었다.
그래 엄마, 그래요, 하면서.-22
해마다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을 낫으로 끊어내며 가야 하는 마른 도랑과 뱀이 늘어져 있곤 하는 덤불,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휘어진 나무와 이끼들, 볼품없이 이지러진 봉분과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들, 묘를 둘러싼 밤나무, 소나무의 침묵을 그들은 몰랐다. 이순일이 매년 낫으로 길을 내며 거기로 올라가는 이유를 한세진은 이해했다.
엄마에게는 거기가 친정일 것이다. 그 묘가.-17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44
군말없이 이순일의 힘듦, 기억들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는 한세진은 가까운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__은 __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__의 그늘에서 식어가는 걸까.
<파묘>
한세진의 가방은 한영진이 보기에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미 더러웠고 밑쪽 귀퉁이엔 밟혀서 생긴 듯한 발자국까지 있었다. 아무 때나 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 게 틀림 없다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들고 다니기에 편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든 아무데나 내려놓기엔 편한 가방, 그런 걸 저 애는 들고 다니네, 라고 생각하며 동생을 보았다.-60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70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덕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75
엄마,엄마, 한영진은 말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자요.
너무 늦었어.-78
그런데 엄마, __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81
각별해요. 각별하다는 건, 각별해서 멀어질 수 없고 각별해서 책임이 있고, 각별해서 벗어날 수 없다. 각별해서 죄책감과 무력감, 좌절감을 느낀다. 각별하니까, 각별하니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했다. 간격없이 밀착되었다. 숨을 제대로 뱉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
이순일의 눈과 입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입속에 든 눈은 금세 녹아 목구멍으로 흘러들었다. 이순일이 평생 맛본 것 중 그것과 닮은 맛을 가진 사물은 무명밖에 없었다. 싸늘한 무명. 소색실로 짠 그물 같은 맛.-87
그게 무엇이든 이순일은 가책을 느꼈다. 그게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건넨 것이 그 아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쪼개졌고 그 파편을 쥐고 있느라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109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고 지냈다. 잃은것을 잊은 것으로 해두었다. 그러면 그건 거기 있었다-112
손아귀에 힘이 하나도 없는 아이들. 뭘 움켜쥘 줄을 몰라 바깥에서 무슨 일을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사라질 것 같은 아이들.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138
수십년 살림으로 손이 굳고 곱았는데도 뜨거운 것에 닿으면 여전히 뜨겁다는 것이 이순일은 성가시면서도 경이로웠다.-141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142
순자의 고유한 삶. 그 개별적인 시간들은 “순자들의 삶”에 한데 묶여 가라앉아야 했다.
나는 순자인데 돌아보면 너도 순자였어.
묵묵히 침묵해야 했던 날들. 싱겁게 넘겨야 했던 삶.
<무명>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그 말을 들었을 땐 기막혀 화만 났는데 요즘 그 말을 자주 생각해.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147
사우스 풀, 노스 풀.
...... .
수천수만 톤의 물로도 채워지지 않는, 억겁의 시간으로도 완성되지 않는, 고요해지지 않는. 누구도 그 바닥을 모르고, 알 수는 없는.-173
안산 생명안전공원.
명품 도시.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어.
용서할 수가 없어.-174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다가오니까, -183
<다가오는 것들>
'하해의 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을 읽고_천개의 파랑(천선란) (0) | 2024.09.19 |
---|---|
글을 읽고_복자에게(김금희) (0) | 2024.09.19 |
글을 읽고_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2) | 2024.09.19 |
글을 읽고_체공녀 강주룡(박서련) (0) | 2024.09.19 |
글을 읽고_딸에 대하여(김혜진) (0) | 202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