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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해의 품

글을 읽고_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by luvlee 2024. 9. 19.

나는 열다섯 이후로 지금껏 모래성이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우수수 무너져버리는. 그런데 이제는 정말 힘든 것 같다. 갈수록 더 작은 땅의 진동에도, 더 가벼운 손짓에도 스러져 내린다. 더 이상 누군가 나를 건드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버티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이제는 아예 무너져 있고 싶은데, 그러려면 나를 어디까지 버려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놓아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나를 미워하고 괴롭혀야 하는 걸까.-29, 페이스북 페이지 연세대학교 대나무 숲 #43814.

 

범인들은 정신의학적으로 질병을 가졌을 수 있고, 그 질병이 범죄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행위가 왜 '하필이면 그렇게' 전개되었는가이다. 사건 사고의 원인을 그저 질병으로 환원하는 것만큼 간편하고 게으른 설명은 없다.-37

 

모욕의 순간을 자주 경험해야 했던 사람은 그런 상황에 노련해질수록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일치하는 경험에서 멀어진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쌓는 일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어떤 '타자'에게 온전히 몰입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분노 혹은 감동하거나, 특정한 현실에 완벽하게 실재하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삶이 일종의 연극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큰 진실을 위해 거짓을 연기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빛내는 데만 몰입하는 사람들은 작은 진실을 위해 큰 거짓을 연기한다. 나는 이를 '품격주의적 태도'라고 부르고자 한다.-49,50

 

칸트는 인간(이성적 존재자)은 모두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를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만 한다"라고 전제한 후 "목적들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가격 또는 존엄성을 가지며, 가격은 "같은 가격을 갖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있는 반면 존엄성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고 말한다. 칸트에게 존엄성이란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그 자체가 반드시 목적으로도 존재할 때 부여되는 내적 가치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존엄하다면 우리는 그 인간을 자신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삼아서는 안 된다.-57

 

품격을 강조하는 이들이 속물성의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품격주의자는 고상한 척 공연을 만들고 권력과, 권위, 지위, 경제적 이익을 교묘하게 추구하는 기획자에 가깝다. ……속물은 필요하다면 노골적으로 잔인하고 야한 연극을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좇는 기획자와 유사하다.-63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71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련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이야말로 적극적 부정의 한 예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요새 안에 들어앉아 있는 나의 자아를 배신하는 실천이다. ……때로 무력하고 별 볼 일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 거기서 우리는 타인 지향성을 넘어선 진정성의 한 형태를 본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 해야 한다. 그 가능성은 이제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나의 몸, 운명, 삶, 실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91,92

 

현대 국가의 생명과학기술 정책은 물론 장애인에게 낙태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장애아의 출산을 예방하는 기술을 제공하고 부모의 선택에 맡길 뿐이다. 하지만 생명공학기술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장애아를 출산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안길 수 있다. ……유전자진단기술을 통해 장애아를 '걸러낼' 수 있는 사회는 해당 장애에 대한 의료, 사회복지 지출에 둔감해지기 쉽다. 그냥 '걸러내면' 될 것을 굳이 낳아서 치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개인은 사회에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죄책감은 타당할까? 위 프로그램의 의미를 소개하면서 연구자 황지성은 첨단기술을 활용할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은 사회적 차별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일정 범위 안에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다만 그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장애아가 태어나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결국 모든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115,116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된 자기 조건의 일부를 스타일의 토대로 삼거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시도는 결국 정신승리가 아닐까?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단념한 채 살기 위해 펴는 전략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잘못된 삶을 정체성의 일부로 수용하는 일과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정신승리가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124,129

 

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의 규정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 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 자체임을 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내용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148,149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링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생리나 출산 등)을 티내지 말 것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 문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장애로 인한 특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예다. 켄지 요시노는 커버링에 대한 법적인 대응 방법을 고민하면서, 그중 하나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를 제안한다.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에서는 다수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라도 그것을 말한 주류 집단 쪽에서 그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철저히 제시해야 하는데, 킨지 요시노는 법이 이를 강제하거나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199,200

 

"우리나라에서는 너희가 버스랑 지하철을 못 타잖아. 이게 당연한 걸까?

"장애인이니까 못 타죠."

"버스는 대중교통이잖아. 장애인은 대중이 아니야?"

"……."

"대중교통이면 휠체어를 탄 사람이든 목발을 짚은 사람이든 모두 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너희가 버스를 못 타는 게 너희 잘못은 아니야."-217, 1990년대 후반 특수학교에서 김원영 작가님이 기억하는 도덕시간 중 선생님과 학생들의 대화.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와도 같다. 따라서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은 장애인이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서 자원 분배를 평등하게 하는 정의 실현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은 정당한 편의 제공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가 휠체어를 자기 몸의 일부로, 일종의 '스타일'로 삼아 오랜 기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241

 

나는 아름다움에 우열이란 없고, 미의 기준은 소비자자본주의의 농간으로 획일화되었다는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물론 그런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젊고, 적당한 키와 몸무게를 가졌고, 손상이 없는 몸은 대체로 그렇지 않은 몸에 비해 아름다울 가능성이 높다. 다만, 우리의 뇌는 사진기가 아니라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눈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사진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음악에서 한 부분의 음을 떼어내 들려주는 것과 같다면 초상화는 그 사람이 그동안 보여준 여러 특징과 모습을 겹겹이 농축시켜 한번에 화음처럼 들려준다.-272,273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는 그 사람과 함께한 모든 순간에서 그가 보여준 미세한 떨림과 다양한 표정, 긴장했을 때 움츠러들던 어깨, 해질 녘 그림자가 진 옆 얼굴, 지쳤을 때의 목소리, 들떴을때면 쭉 펴지던 목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힘껏 들어올릴때의 팔뚝 등이 하나로 밀도 있게 통합되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 내 눈에 들어오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덧씌워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비합리적 힘에 도취된 상태가 아니라, 오랜기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합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훌륭한 화기일수록 스냅사진의 매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포착할 것이다. 물론 초상화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276,277

 

"저에게는 무척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이 친구를 그렇게 들여다보지 않고 누가 감히 그 사람의 진가를 평가할 수 있을까요?"-남윤광씨의 활동지원인이었던 정내귀씨와의 인터뷰 中


인어공주 이야기를 코믹하게 비튼 이 공연에서 주인공 에어리얼은 육지 상남자를 찾아 바다에서 나와 헤매다 모두 실패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입은 옷을 찢어버린다. 관객과의 대화시간에 한 관객이 이 장면의 의미를 물었다.

"[가지기를]원하는 것보다 스스로 되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더 주체적인 욕망이기 때문입니다."-박환수 연출, 이원재 배우 참여 공연<over the sea>관련. 283,284

 

우리가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된 나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조건을 받아들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객관적으로 좋은 가치를 가졌음을 우리 부모에게, 나 자신에게, 이 사회에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들은 분명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얼마간은 객관적으로도 산물적인 가치를 갖지만, 설령 이러한 질병과 장애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나의 부모에게(연인,친구,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이 사회에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이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308

 

우리는 서로의 삶이 존중받을 만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 속에서 어느 순간 강인한 투사의 모습이 아니라면 결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외로운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좋다. 장애를, 예쁘지 않은 얼굴을, 가난을, 차별받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도 모든 것을 당당히 부정하고, 자신의 결핍을 실천적으로 수용하고, 법 앞에서 권리를 발명하는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서야만 우리가 존엄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하지는 못할 이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 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310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 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31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