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는 무슨 일인지 살얼음이 언 연못에 떨어져 날개를 퍼덕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날개를 퍼덕거릴 때마다 오히려 다리가 미끄러져서 날개가 물기에 젖었다. 일어서기 위해서는 날개를 움직여야 하는데 날개를 움직이면 몸이 차가워져 동사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홍유가 잠깐만요, 하더니 도서관 밖으로 나가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까치를 집어냈다. 그리고 자기 차에서 수건을 꺼내 닦았다. 한 시간쯤 지나 새는 기력을 되찾았다. 홍유는 그때 내가 "뭘 그렇게까지 해요?" 하고 물었다고 기억했다. "안 그러면 죽지 않겠어요?" 홍유가 말하자 내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꼭 넣은 채 "어차피 그런 것도 다 자연인데요" 했다고. 홍유는 바로 그 말을 듣고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때 손절했어야 하는데, 하는 홍유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아파 보여서 그럴수가 없었네, 하는 말도.-31
"사람을 한번 만나면 그 사람의 삶이랄까, 비극이랄까, 고통이랄까 하는 모든 것이 옮겨오잖아. 하물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야. 이를테면 판사는 그때마다 눈을 맞게 되는 것이야. 습설의 삶이랄까. 하지만 눈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39
사장은 바구니에 담긴 귤을 가리키며 공짜니까 가져가라고 했다. 귤들은 푸릇했고 점무늬가 있기도 했지만 싱싱해 보였다. '비닐봉지 제공 불가. 손에 쥘 수 있는 만큼만 욕심내기'라고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나는 누가 비닐봉지까지 달라고 하냐고 사장에게 물었다. 아주 양심이 불량하네, 하고. 맞장구를 칠 줄 알았는데 사장은……(생략)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게 사람이죠."-47
나는 영웅에게 "성당에 가면 신부님이 주로 어떤 축원을 하시지?"하고 물었다. 영웅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 슬퍼할 줄 아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올바른 것을 위하다 힘들어진 사람, 그런 사람들이 다 복을 받는다 하시지. 그런데 나는 그런 게 싫다. 거짓말 같아서"-66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 하루가 활기차다고도 했다.-81
생선을 토막 내고 오징어를 손질하는 주인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파리떼가 그의 유일한 아우라 같았다고 고모는 적었다. 오직 그것만이 토막 난 생선처럼 종결되지도 않고 차양 아래 오징어처럼 다 물러지지도 않은 채 생이 계속된다고 증언하는 듯했다. 그 비린 것에 달라붙는 파리떼처럼 칼과 도마와 고무장갑에 내려앉았다가도 공기 중으로 와락 떠오르며 우리도 산다고, 우리가 이렇게 구차하고 끈질기게 기꺼이 산다고.-163
기억에 있어서는 늘 담아두는 것보다 그렇게 효율적으로 지우는 것이 중요했으니까.-182
복자네 할망은 고고리섬에서 본 어떤 사람보다도 강한 해녀였어. 제주 속담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친정에 가느니 바다로 간다'는 말이 있다. 복자네 할망에게 들었지.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 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잘되지 않겠니?-189
나는 그때 복자가 나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더 아팠다.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믿을 힘이 없다는 것, 눈으로 보이지 않는 편까지 헤아려 누군가의 선의를 알아주기 힘들다는 것까지는 나 역시 헤아리지 못했다.
윤호가 네가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너무 참혹해서 눈물을 흘릴 거야, 라고 하며 내게 마지막까지 기대라는 것을 했을 때 나는 그런 건 없어,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변해버린 마음은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누군가를 버린 사람들은 그냥 버린 사람들로 남는다고, 오직 그렇게만 믿으려 하면서.-217,218
언젠가 나뭇가지에 걸린 방패연을 한참 동안 올려다본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다 찢기고 나서도 여전히 바람이 불면 그것을 타고 하늘하늘거리면서 오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장면이 생각났다.…… 나는 그것이 누군가를 아프게 떠올리면서도 좋은 기억들도 잊히진 않아 어쩔 수 없이 슬픔과 기쁨 사이에 걸려 있는 내 마음 같다고 일기장에 적었다.-221
……(생략) 영웅은 그저 보관용이라고 설명했다.
자기는 영상을 찍어서 그걸 직업으로 삼는 일보다 간직하는 일에 더 열의를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그건 어느 면에서나 실패가 아니라고.
"그래, 실패는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이름을 붙인다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사표를 낸 것과 너가 더이상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를 하지 않는 것."
영웅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생각하더니 "글쎄, 그런 건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한다는 자세 아닐까?"라고 결론 내렸다.-233
제주 4.3폭동, 제주 의료원 사고, 제주의 한 섬에서의 계절을 보낸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 그 외.
*고고리섬은 책 속 가상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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