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12
기념 세일, 감사 세일, 마지막 세일, 특별 세일.
세상은 언제나 축제 중이고 즐거워할 명분투성이인데.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눌 곳 없이 그 축제의 변두리에서, 하늘을 어깨로 받친 채 벌 받는 아틀라스처럼 맨손으로 그 축제를 받치고 있을,
누군가의 즐거움을 떠받치고 있을 많은 이들이, 도시의 안녕이, 떠올랐다.-43
말과 글의 힘 중 하나는 뭔가 '그럴' 때, 다만 '그렇다' 라고만 말해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신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52
속삭임.
…… .
정작 하고픈 말을 하지 않아도 무관.
계절이 바뀐 뒤에야 바람이 나무에게, 나무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한 건지 알게 되는 것처럼. 이 둘이 하는 일 역시 나중에 드러나는 일이 흔함.-55
세상에는 기울어져야만 넘어지지 않는 순간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바로 선 것보다 안정적이었다. 반짝거렸다.-77,78
나는 부사를 ‘꽤’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매우’ 좋아하며, 절대, 제일, 가장, 과연, 진짜, 왠지, 퍽, 무척 좋아한다.-87
부사는 과장한다. 부사는 무능하다. 부사는 명사나 동사처럼 제 이름에 받침이 없다.
그래서 가볍게 날아오르고, 허공에 큰 선을 그린 뒤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바로 그거’라고 시치미를 뗀다.
부사 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참’,’퍽’,’아주’ 최선을 다하지만 답답하고 어쩔 수 없는 느낌. 말이 말을 바라보는 느낌. 부사는 마음을 닮은 품사다.-89
겨울이다. 초겨울. 글자로 적고 입으로 불러본다. 초는 한자, 겨울은 우리말. 초는 처음이란 뜻. 그러나 ‘비로소’라는 의미도 있다.-115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124
바람이 일어나는 등압선을 보듯. 활자가 돋아나는 손가락 끝 지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125
그러고 보면 시간은 정말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어지고 포개지는 모양이다. 그렇게 돌아오고 어느 때는 나보다 먼저 앞에 가 있다 나를 향해 뚜벅뚜벅 자비심 없는 얼굴로 다가오고 때론 한없이 따뜻한 얼굴로 멀어지기도 하면서.-148,149
그녀와 만나는 동안 그녀에게 자주 듣지 못한 말 중 하나는 옛날이야기였다. 나는 그게 서운하다기보다 그녀가 자기 속에 어떤 ‘아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짐작했다. 어느 선생이 인간의 심연을 ‘신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골짜기’라 표현하셨던 것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 아낄 것이 있는 작가는 그만큼 다른것도 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지 싶다.-161
같은 색깔을 가진 자석처럼 말과 마음의 ‘극’이 같아, 가까운 것끼리 멀어지며 자장을 만들어냄.-173
책을 읽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추는 이유는 다양하다. 모르는 정보라. 아는 얘기라. 아는 얘긴데, 작가가 그 낯익은 서사의 껍질을 칼로 스윽 벤 뒤 끔찍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 보여줘서. 그렇지만 완전히 다 보여주지는 않아서. 필요한 문장이라. 갖고 싶어서. 웃음이 터져. 미간에 생각이 고여. 그저 아름다워서.-239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나니.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250
얼마 전 ‘미개’라는 말이 문제 돼 그 뜻을 찾아봤다.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 수준이 낮은’이라는 뜻이 먼저 등장했지만 그 아래 ‘열리지 않은’이란 일차적인 뜻도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 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262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좀 놀랐다. 그러고 그 놀랐다라는 사실 때문에 내가 철저히 그녀의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어떻게 더 노력하라는 건지,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건지 알 수 없어 때때로 절망스러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 속에선 황량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육체적, 정신적, 금전적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의 무관심과 폭력 속에 홀로 버려진 느낌을 받을 때 그 시간에 잠겨본 자만 알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266
이 경사(傾瀉)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끄러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 .(생략)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268,269
이제 그녀 곁에 다가가 나란히 쪼그려 앉아보려 한다.
그러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어볼 생각이다.
당신, 대체, 거기서 무얼 그리 열심히 보는거냐고.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노골적인 김애란 작가의 글이 좋다. 글의 멋부림이 좋고, 잘 들여다보면 소박해서 더 좋고, 오지랖이 넓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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