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노트>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난 너희를 사랑해…… 난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난 너희만 사랑할 거야……영원히…… 너희는 내 인생의 전부야…… ."
반복하다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 말들이 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27
"아저씨도 아시다시피, 우는 건 소용없는 짓이에요. 우리는 절대로 울지 않아요. 우리는 아저씨처럼 어른이 아니라구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너희 말이 옳아. 미안하다. 이제 안 그럴게. 단지 너무 지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을 뿐이야."-49
부자는 문을 열고, 가난뱅이를 발로 걷어찬다. 가난뱅이는 거리로 나가떨어진다.
부자는 문을 닫고 수프 접시 앞에 앉아 접시를 두 손으로 감싸며 말한다.
"주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합니다."-111
"너희는 너무 예민해. 너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희가 본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우리는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거예요."-117
우리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배에서는 창자가 터져 나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아기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머리는 폭탄으로 팬 구덩이 속에 늘어져 있었다.
두 눈은 뜬 채 아직도 눈물에 젖어 있었다.
…… .
사촌 누나가 시내에서 돌아와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우리가 말했다.
"응, 폭탄이 떨어져서 정원에 구덩이가 생겼어."-155,156
우리가 물었다.
"정말 죽고 싶으세요?"
"내가 그밖에 뭘 바라겠어? 날 도와주고 싶거든, 이 집에 불이나 질러줘. 이런 꼴로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는 않으니까."
우리는 말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런 걱정까지는 안 해줘도 돼. 불이나 질러. 너희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그럴게요, 아주머니. 저희는 할 수 있어요. 저희를 믿으세요."-165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 가게 하는 것이다.-192
<타인의 증거>
"이제 어떻게 한다?"
"예전처럼 아침이 되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고,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면 되는 거지."
"오래 걸릴 거야."
"어쩌면, 평생 동안."
…… .
달이 밝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서 치즈를 조금 먹고, 포도주를 마셨지만,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토했다.-198
"넌 슬퍼해야 할 일이 없겠구나?"
"네, 그래요. 저는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마음을 달래거든요."-205
아이가 말했다.
"죽은 사람들하고 떠난 사람들하고는 한 가지 차이밖에 없어, 그렇지? 죽지 않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루카스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없는 동안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283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302
"이제, 재밖에 안 남았네."
루카스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브랜디 한 병을 따서 마셨다. 구역질이 났다. 그는 다시 정원으로 가서 토했다.
…… .
해가 뜨고, 루카스가 눈을 떴다.
"무슨 일이 있었니, 마티아스?"
아이가 말했다.
"또다른 새로운 악몽일 뿐이야."-307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 .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본질만이 중요해요."
…… .
"……하지만 노인께서 방금 말했듯이,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있지요."
불면증 환자는 눈을 뜨고 루카스를 바라본다.
"희미해지고, 줄어들고,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네."-316
아이가 말했다.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누가 혁명에 이긴 거야? 그리고 왜 뭐든지 금지하지?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못됐지?"
루카스가 라디오를 껐다.
"이제 라디오는 듣지 말아야 해. 들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저항운동과 투쟁과 동맹파업이 계속되었다. 체포,투옥,실종,처형도 계속되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이만여 주민이 국외로 떠났다. 몇 달 뒤, 다시 침묵과 평화와 질서가 다시 지배했다.-324
<50년간의 고독>
"제가 관심 있는 것은요, 당신이 쓰시는 글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 하는 점이에요."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는 나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394
"생각에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
내 형제가 자기 지팡이로 내 턱을 들어올린다.
"생각하지 마. 저길 바라봐! 저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이 있어?"
나는 눈을 든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아니, 한번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403
"여기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정말 궁금하군. 일종의 일기 같은 거니?"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니요, 순 거짓말이죠."
"거짓말이라고?"
"네. 꾸며낸 얘기예요. 진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얘기지요."-469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모두 읽고 뒤이어 읽었던 책이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내가 너무 무지해서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아 보류했다. 백페이지 가량 되지만 그 절반 정도를 꾸역꾸역 읽다가 결국 손을 놓았다. 책의 초반에 인상 깊은 문장이 있어 적어둔 것이 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보며 느꼈던 생각과 비슷해서 여기에 옮겨보았다. 뒤이어 오는 문장은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이다. 책의 감상문을 찾아보다가 자극적인 표현이 비위를 상하게 만든다는 글을 많이 봤다. 비위가 상하고 마음도 상한다.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가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루카스의 말대로 진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얘기다. 마음을 단단하게 먹었지만 덤덤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높은 확률로 현실보다 충분히 미화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드러낸 글이다. 그것 뿐인 글이다. 더 다듬어 부드럽게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이유는 없는 글.
드러내서 불편해보이는 글. 사람들을 써낸 사람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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